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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시대와 고려 건국
8세기 후반부터 신라 왕권이 급격히 악화되고 귀족 사이에 분열과 왕위 다툼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진성여왕과 최치원의 개혁정치가 실패한 이후 신라는 서서히 붕괴되고 지방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한다. 새로운 세력중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면서 후삼국시대가 열렸다.
후백제, 후 고구려의 건국
지방의 호족세력 중 궁예와 견훤이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다. 이들이 건국한 새로운 나라와 신라가 서로 존립하면서 새로운 삼국시대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892년부터 936년까지 40여 년에 걸쳐서 한반도에는 3국이 대립했고 최후의 승자는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다. 신라는 골품제도라는 독특한 신분제도를 이용해서 왕조를 유지했다.
이러한 신분제도는 특정 소수 신분에 권력이 집중되었고 왕권은 약화되었다. 심지어 왕위를 놓고 서로를 죽이는 일이 벌어지면서 왕권의 약화되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점차 약화되었다.
왕과 귀족의 사치는 심해지고 재정이 고갈되자 지방에 세금의 징수를 더 혹독하게 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백성들의 잦은 반란이 발생한다. 891년 양길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커다란 세력을 형성했고 완산지역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다.
견훤은 옛 백제지역을 거의 회복하면서 신라를 위협할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고 양길의 부하인 궁예는 양길과 결별하고 강원도 일대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태봉국을 세운다.
궁예의 태봉국, 견훤의 후백제, 그리고 신라 삼국은 서로를 공격하면서 세력을 넓히려고 노력했다. 견훤은 스스로 백제왕이라고 칭하면서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기까지 한다.
궁예 또한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강압적인 정치와 신하들을 믿지 않고 심지어 부인과 아들까지 살해한다. 궁예의 부하인 왕건이 이때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한다.
그리고 국호를 고려로 변경한다. 이때부터는 후백제, 신라, 고려가 대립하는 관계로 변경된 것이다. 백제의 견훤은 신라를 공격해서 서라벌을 점령하고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즉위시킨다.
이때에는 견훤이 삼국 중에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왕건은 신라를 구하지 위해서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지만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대패했다. 신숭겸을 비롯한 측근들의 활약으로 겨우 탈출해 성공해서 고려로 돌아왔다. 팔공산은 고려의 8명의 공신이 죽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의 건국
수세에 몰린 왕건은 세력을 다시 수습해서 백제와 대립하고 신라는 이미 국가로서 기능이 거의 마비된 상태이다. 후백제의 견훤의 세력이 삼국을 통일할 정도로 막강했으나 후백제는 내분에 의해서 급격히 무너진다.
견훤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아들 사이에서 반감이 있었고 견훤의 아들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스스로 왕이 된다. 이때 왕건은 신라 경순왕을 설득해서 항복을 받아낸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러 올 때 왕건이 몸소 경순왕을 맞이하러 갈 정도로 극진하게 대했으면 경순왕의 딸과 왕건은 결혼했다. 경순왕은 항복을 했지만 신라 지역을 그대로 다스리는 권리를 받았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의 전설이 이때 생겨났다. 신라의 항복을 받아낸 왕건은 백제로 눈을 돌려 견훤과 은밀하게 접촉한다. 견훤은 아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유폐된 것에 대해 매우 비참한 심경을 가지고 있어 왕건에게 투항한다.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자 왕건은 마지막 남은 신검의 백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군사를 일으켜 신검을 공격한다. 이때 견훤도 군사를 이끌고 참전한다. 신검의 군대는 견훤을 보자 대부분 항복하고 신검은 포로로 잡힌다.
견훤은 신검을 후백제가 멸망하자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이 무너뜨렸다는 자괴감이 컸다고 한다. 이로서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의 태조가 된다. 44년에 걸친 후삼국 시대는 이렇게 끝나고 한반도에는 새로운 왕조 고려가 새워졌다.
고려 태조 왕건
왕건은 송악의 호족 왕융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건이 태어나기 전 군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왕건의 초기에 궁예의 부하로 있었으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다.
이후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의 딸들과 결혼을 하면서 동맹을 맺는다. 이러한 동맹을 위한 결혼이 왕건 사후 왕위를 놓고 서로 다투는 극심한 혼란의 원인이 된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북방에 존재했던 발해가 요나라에 멸망하자 발해의 유민들을 흡수한다. 고구려를 계승한 왕건은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려고 북진정책을 폈다.
왕건이 죽으면서 후대의 왕들에게 남긴 훈요십조를 보면 대표적인 것이 불교를 장려하고 북방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왕건이 죽고 태자 무에게 왕위를 넘겼지만 왕건의 결혼 정책으로 태어난 많은 자식들은 왕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면서 고려는 극심한 혼란과 형제간에 서로 죽이는 골육상쟁이 발생한다.
고려왕조는 무신정권이후 정상적인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무신정권 시기에는 무인들에 의해서 왕이 교체되거나 살해되기도 했다.
무신정권 100년이 지나고 몽고의 지배를 다시 받았다. 이때에는 고려왕들이 원나라 부마였다. 그래서 묘호도 사용하지 못했고, 왕 이름에 충자가 붙어 있다.
몽고 지배기에 고려왕들은 즉위했다가 폐위되고 다시 즉위하는 이상한 상황이 반복적으로 일어났고 고려를 떠나 원나라에서 원격으로 통치하기도 했다.
2021.09.18 - [분류 전체보기] - 고려왕 계보, 고려왕 순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