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묘청의 난, 만적의 난, 왕규의 난, 강조의 난, 이자겸의 난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조시대에 반란은 항상 있었다.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아주 많지만 왕조를 교체하거나 왕권을 잡는 반란이 아니면 모두 실패한다. 고려시대 반란도 대부분 실패하는데 가장 성공한 반란은 위화도 회군이다.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는 멸망한다.

고려시대 반란

고려시대 반란 중 성공한 대표적인 반란은 무신정변이다. 무신정변과 강조의 난만 성공했고 나머지는 모두 실패했다. 왕조시대 반란의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반란의 성공은 왕을 교체하거나 절대권력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공식적으로 최초의 반란은 왕규의 난이다. 왕건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혜종은 외가 세력이 약해서 적장자로 왕위를 승계했지만 왕권을 휘협받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규가 자신의 외손자 광주 원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모두 처형된다. 두 번째 반란은 강조의 난이다. 목종을 폐위시키고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를 귀양 보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이어서 강조는 김치양 일파를 제거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거란이 전쟁을 일으킨다. 천추태후만큼 권력을 누린 사람이 이자겸이다. 왕의 장인으로 섭정을 했다.

 

예종과 인종의 장인 신분으로 섭정을 하면서 반대파 인사들을 숙청했다. 영광굴비의 어원을 만들어내 사람이고 시인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부정부패가 심했고 월권행위를 하면서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자겸이 반대로 사돈인 척준경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왕궁을 점령한다. 집권에 성공한 이자겸 음 조정을 장악했고 반대파를 모두 제거했다. 하지만 같이 반란을 일으킨 척준경과 갈등이 생겨 결국 척준경에게 제거된다.

이자겸은 전라도 영광 법성포로 유배되어서 죽는다. 묘청의 난은 서경 천도가 원인이 되어서 발생했다. 이자겸의 난과 같이 인종 시대에 발생한 난이다. 묘청의 난은 실패했는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김부식에 의해서 진압되었지만 묘청이 죽고 나서도 1년 이상 반란이 계속되었다. 신채호 선생이 묘청의 난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국수주의 적이고 배타주의 적인 입장을 가지고 금나라 정벌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천민 출신이 반란을 일으킨 대표적인 사건이 만적의 난이다. 만적은 최충헌의 노비로 무신정변 이후 신분제도가 많이 무너지면서 노비들도 세력을 규합해서 난을 일으킨다. 이들은 신분해방을 목적으로 난을 일으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노비해방운동이다.

반란이 가진 의미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계층이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노비신분인 만적의 난과 망이, 망소의 난은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혁명적인 사상을 가진 반란이었다.

 

정중부가 일으킨 무신정변은 100년간 고려를 무인들이 통치하는 상황을 만들었고 삼별초의 난은 민족의 자긍심을 이어가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단지 권력을 얻고자 일으킨 반란은 대부분 실패했다.

 

고려시대 반란이 가진 의미 중 가장 큰 것은 신분을 극복하려는 노비 해방운동 차원에서 일어난 반란이다. 결국 고려 말기에 일어난 이성계과 조민수가 일으킨 난으로 인해서 고려를 멸망한다. 왕건이 난을 일으켜 고려를 건국했지만 난으로 인해서 고려가 멸망한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