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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도 실리도 없는 인조반정

1623년 4월 11일 새벽 홍제원에서 김류를 대장으로 하는 반정군 700명은 창의문으로 진군했다.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을 제압하고 돈화문을 부수고 궁궐에 난입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가 즉위했다. 인조실록 제1권에 나오는 인조반정 기록이다.

 

인조반정 발생 원인

반정군이 내세운 대외적인 명분은 폐모살제와 제조 지은이다. 두 가지 명분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했다.

 

두 가지 명분을 중 하나인 폐모살제는 광해군이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는 반인륜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내용만 놓고 보면 광해군의 행동이 조금 과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조선시대 왕들은 이보다 더한 행동도 많이 했다. 광해군의 즉위 과정은 살 어음판의 연속이었다.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는 조선시대 최초로 방계 출신으로 왕이 되었다.

 

선조는 자신에게 붙어 있는 방계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아주 싫어했다. 꼬리표를 떼기 위해서 정통성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고 싶었다.

 

주변의 반대로 실패했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왕으로 만들면 자연스럽게 자신도 왕의 아들이 되어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선조가 조상을 미화하는 작업에 실패하자 반대로 자신의 아들은 적자가 왕위를 이어가길 바랬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이러한 계획은 수정해야 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가는 상황에서 신하들이 주청 하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선조도 광해군도 서로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일이 복잡해졌다.

 

선조는 적장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싶어 했고 이러한 선조의 마음을 눈치챈 신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불안하고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영창대군은 어렸고 선조는 병약해서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다. 신하중 이이첨과 정인홍은 광해군이 폐세자가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아내면서 광해군이 즉위하자 주요 요직에 앉는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의 대북 세력이 집권을 하면서 서인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영창대군을 역모죄로 사사시킨다. 정인홍을 포함한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이이첨의 주도로 계축옥사를 일킨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토를 회복하고 백성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만주지역에 떠오르는 세력인 후금과 가까이 지내는 외교정책을 편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도와준 조선의 이러한 행동에 불만이 있었다.

 

서인을 중심으로 한 반정세력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제조 지은이다.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은혜를 명나라에게 받았는데 오랑캐인 후금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배신행위라는 것이다. 이두가지 명분으로 반정이 일어나고 광해군은 폐위된다.

 

반정 결과

반정에 성공한 반정군은 유폐된 인목대비를 찾아가 인조가 즉위하는 것을 허락받고 이이첨, 이위경 등 대북파의 핵심인물들을 사형시킨다. 집권에 성공한 반정세력은 후금과는 외교적으로 단절을 하고 명나라를 섬기게 된다.

 

실리보다는 명분에 치우친 결과이다. 반정세력의 논공 해상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세력이 등장한다. 이괄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괄은 자신이 2등 공신에 책봉된 것과 아들이 역모에 연루된 것을 계기로 군사를 동원하여 도성을 공격한다.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이괄은 제압되었지만 커다란 북방 국경을 지키는 병사 대부분이 사라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가 군사를 이끌고 침략을 했다.

 

청나라의 침략은 이전의 임진왜란과 양상이 달랐다. 임진왜란은 막을 수 없었을지 몰라도 병자호란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고 예상이 가능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50일가량을 버티지만 결국은 항복을 하게 된다. 인조실록과 승전 원일기의 기록을 보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포함해 수만 명의 조선인이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갔다.

 

조선은 임진왜란의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병자호란을 겪었고 왕을 포함한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되었다. 명분에 치우친 인조반정은 조선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인조반정은 명분도 살리지 못했고 실리도 없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폐모살제와 제조 지은이다. 조선의 성리학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나라이다. 효가 모든 것의 기본인데 불효를 하고 동생을 죽인 임금을 몰아내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리고 은혜를 입은 명나라에 의리를 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에 의리를 다하지 못하고 청나라에 굴복했고 수많은 백성을 궁핍과 핍박으로 몰아넣았다. 인조반정은 명분도 실리도 없었다. 그저 정권에 대한 야욕으로 일어난 일이다.

 

인조는 명나라에게 은혜를 갚지 못했고 청나라를 상국으로 모시게 되었다. 시대적 상황을 읽지 못했고 나라를 지킬 힘도 없었던 것이 인조반정 세력이다.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피해는 모두 백성들이 떠안아야 했고 수십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은 청나라에서 노예로 생활을 해야 했고 돌아와서는 환향녀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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