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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아버지 대원군
왕실은 일반 백성과 다른 호칭을 사용했다. 왕비의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을 부원군이라고 한다. 왕의 아버지는 당연히 왕이 지만 그러하지 못한 경우도 많다. 그럴 때 사용하는 호칭이 대원군이다.
조선시대 왕의 아버지
대원군이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선조이다. 선조는 조선 최초로 왕의 아들이 아닌 왕자가 왕이 된 케이스다. 명종에게 아들이 없어 명종은 자신의 이복형제 아들 중 한 명을 세자로 책봉했고 명종이 죽자 왕으로 즉위했다. 선조이다.
선조는 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족보를 고치기로 한 것이다. 선조의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면 자연스럽게 자신은 왕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선조의 이러한 생각은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로 수포로 돌아간다. 아버지를 왕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다. 덕흥대원군이 선조의 아버지이다. 덕흥군에서 덕흥대원군으로 칭호가 변경된 것이다.
덕흥군은 중종의 서자였다. 29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해서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두 번째로 대원군이란 호칭을 받는 사람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이다. 인조 또한 선조처럼 방계 출신의 왕이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으로 왕이 되었다. 자신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선조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다. 아버지를 대원군으로 만드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고 왕으로 추존했다. 원종이다.
선조가 실패한 아버지를 왕으로 만든 작업을 인조는 성공했다. 정원군에서 정원대원군으로 그리고 원종이 된 것이다. 조선 최초로 세자를 거치지 않고 왕이 된 인물이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이다.
정원군은 선조의 아들이고 광해군과는 이복형제간이다. 광해군 시절 아들인 능창군이 역모에 몰려서 죽임을 당했다.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화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아버지와 형제의 죽음이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였다. 세 번째 대원군은 전계대원군이다. 철종의 아버지로 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이 되었다.
철종은 왕실의 피가 흐르는 왕가의 자식임은 분명 하나 왕의 자격은 없는 편이다. 사도세자의 서자의 서자가 전계대원군이다.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면 살아가던 사람들로 왕실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허울만 왕가의 자식인 것이다.
안동 김 씨의 집권야욕으로 만들어진 철종이 아니면 생겨날 수 없었던 전계대원군이다. 마지막 대원군은 흥선대원군이다. 4명의 대원 군중에 유일하게 살아서 대원군이 된 사람이다.
반대로 말하면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절대권력을 누렸던 사람이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이다. 아들인 고종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무척 많은 자기희생과 노력이 있었다.
살아있는 왕의 아버지
대원군의 다른 호칭은 국태공이다. 왕의 아버지에게 내린 작위였지만 대원군이라는 호칭이 우리에게 각인된 것은 흥선대원군 때문이다. 고종의 아버지 이하응을 부를 때 항상 흥선대원군이라고 부른다.
4명의 대원군 중에서 흥선대원군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죽은 다음에 추존된 것이지만 흥선대원군은 살아있는 왕의 아버지였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고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다.
고종이 왕이 된 이후 10년간 직접 조선을 통치했다. 칭호만 대원군이지 왕이었던 것이다. 고종이 장성하고 며느리 명성황후와 대립으로 인해서 실각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권력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쇄국 정치를 포함한 여러 가지 정치적 실정으로 인해서 백성의 삶과 국력이 많이 약해졌다.
결국은 실각을 했고 청나라에 끌려가는 수모도 당했다. 모든 것이 며느리 명성황후 때문이라고 생각한 흥선대원군은 결국 명성황후 시혜에도 일정 부분 관여를 했다.
흥선대원군이 그렇게 원한 권력을 다시 잡을 수 없었고 아들인 고종과도 원수처럼 지내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에도 고종은 문상을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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