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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장희빈 그리고 인현왕후

조선 19대 임금 숙종은 아들인 영조와 함께 재위 기간이 긴 임금이다. 무려 46년 동안 재위했다. 재위를 오래 한 것뿐만 아니라 현대에 와서 드라마와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임금이다.

숙종은 조선에서 보기 드문 적장자 왕이다. 의외로 조선에서 장남이 왕이 된 경우가 별로 없다. 아버지 현종에 뒤를 이와 왕이 되었고 현종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숙종은 2대 독자이다.

숙종, 장희빈

2대 독자가 주는 의미가 아주 크다. 숙종에게 위협이 될만한 왕족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숙종은 14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를 했지만 수렴청정도 하지 않았다.

 

보통 어린 나이 왕이 즉위를 하면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지만 숙종을 친정을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왕권을 위협할 인물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 큰 이유 중 하나였다.

 

비슷한 나이에 즉위한 단종의 경우 삼촌인 수양대군에 의해서 폐위된 것과 대조적이다. 숙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를 했어도 신하들과 관계에서 거침이 없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고 반대하는 신하가 있으면 귀향을 보낼 정도였다. 숙종은 정치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평생 동안 숙종은 신하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여러 번의 "환국 정치"를 실시했다.

 

환국 정치를 실시할 때마다 신하들은 숙청이 되었다. 당시 조선의 당파는 서로 견제하는 수준을 넘어서 상대방을 완전히 제압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형식을 가졌다.

숙종 초기에는 남인이 득세를 했고 나중에는 노론이 득세를 했다. 경신환국으로 인해서 허적 와 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이 득세를 했다.

 

기사환국을 통해서 반대로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을 중용했고 갑술환국 때는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이 다시 세력을 잡았다. 신사의 옥으로 남인의 나머지 세력이 모두 조정에서 사라졌다.

 

신사의 옥 이후 서인세력이 집권을 했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초기에는 숙종이 소론을 중용하였지만 결국 노론이 조정의 권력을 잡았다.

 

이때 권력을 잡은 노론은 고종 때까지 조선정치의 중심이 되었고 순조 이후에는 세도정치라는 독특한 정치형태로 권력을 독점했다.

 

숙종은 왕비를 네 명이나 두었다. 왕비가 죽어서 새로운 왕비를 둔 것이 아니고 폐비하고 새로운 왕비를 두었는데 그 대표적인 왕비가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와 세 번째 왕비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조선에서 유일무이하게 궁녀에서 왕비가 된 케이스이다. 현대에 와서 숙종이 유명한 이유는 오직 장희빈 때문이다. 장희빈과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는 수십 편에 이른다.

조선시대 악녀의 대명사 장희빈은 사실 숙종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의해서 희생된 케이스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환국 정치를 실시하면서 신하들을 제압했다.

 

장희빈과 인현왕후는 이러한 당쟁의 희생양이다. 장희빈은 남인이었고 인현왕후는 서인이었다. 남인과 서인은 권력을 잡기 위해서 왕비를 이용했다.

 

후궁이었던 장희빈이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오빠 장희재의 역할이 컸다. 당시 조선의 최고 부자였던 장희재는 동생과 자신을 위해 막대한 자금으로 로비를 했다.

 

처음의 승자는 장희빈이었다. 장희빈이 세자(훗날 경종)를 낳으면서 후궁에서 왕비가 되었다. 조선 최초의 일이다. 이때 왕비였던 인현왕후는 폐비가 된다.

 

장희빈은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했고 결국 폐비되어 사사된다. 다시 인현왕후가 왕비가 된다. 악녀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린 장희빈은 사실 억 욱하다.

 

숙종의 사랑의 독차지하고 싶었을 뿐이고 숙종은 왕비들마저도 자신의 권력 강화에 이용한 비정한 임금이다. 장희빈의 아들은 숙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어머니 장희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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