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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이지란 그리고 무학대사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게는 평생을 함께한 조력자가 많았다. 정도전의 경우는 서로 신뢰는 했지만 필요에 의한 관계이지만 이자란과 무학대사는 의형제와 친구 이상의 관계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성계 조상은 전주에서 동북면 화령이로 이주해서 몽고군에 협력해서 벼슬을 한 집안이었다. 당시 한반도 북부지역을 다스리는 몽고의 쌍성총관부 관리로 있었다.
고려 공민왕시절에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은 몽고를 공격하고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는데 공을 세워 그동안 몽고에 협력했던 죄를 면했다고 한다.
아버지 이자춘이 죽자 이성계는 아버지의 벼슬을 그대로이어 받아 동북면을 다스리는 관리가 되었다. 이성계가 유명해진 것은 홍건적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해서 개정이 함락을 당했을 때 수도 탈환작전에 참여를 해서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중앙무대에 알려졌다.
이후 왜구의 약탈을 여러 번 막아내고 황산대첩이라고 하는 왜구와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면서 고려 백성들의 우상이 되었다.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이지란은 이성계에게 큰 힘이 되었고 건국 이후 무학대사는 한양 천도와 생애 후반부에 정신적인 스승이었다고 한다.
이성계 하면 보통 정도전을 떠올리지만 정도전과 이성계의 관계는 서로 추구하는 이상과 목적이 같은 동지 같은 것이 었다면 이지란과 무학대사는 상호 신뢰하는 동반자 같은 관계였다.
이지란
이성계가 홍건적을 몰아내고 왜구를 격퇴할 때 항상 함께한 장군이 이지란이다. 이성계는 동북면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여진족과 함께 생활했다.
그래서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고려에는 흔치 않은 기병을 이끌고 전쟁을 누비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여진족이다.
이성계가 고려에서 막강한 군벌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진족을 사병 화해서 거느리고 있었다. 여진족의 수장이 이지란이었다.
이지란은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어 형제처럼 지냈다고 한다. 이성계가 참여한 모든 전투에 함께 해서 공을 세워 이씨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조선 건국의 결정적인 사건 위화도 회군 때 참가해서 건국 일등공신이 되었고 이후 태종 이방원을 지지해서 왕자의 난에 참여하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했고 전투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중이 되었다고 한다.
이지란의 후손들은 대대로 조정에 중용되었다고 한다. 이성계와 이지란의 관계는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지란은 이성계보다 네 살이나 많았지만 이성계를 형으로 모셨다.
무학대사
무학대사 하면 떠오르는 일화가 "왕십리"이다. 무학대사가 한양으로 조선의 수도를 천도하려고 할 때 노인이 나타나 꾸짖으며 여기서 십리를 더가야 좋은 왕궁터가 있다고 했다. 지금의 경복 궁터는 그렇게 정해졌다고 한다.
무학대사와 이성계가 속내를 나누는 사이가 된 것은 이성계의 꿈을 해몽해 주면서라고 한다. 이성계가 꿈에 "닭이 우는 꿈"을 꾸고 친구인 무학대사를 찾아가 꿈 이야기를 하니 무학대사는 왕이 될 꿈이라고 했다.
이성계 아버지가 죽자 명당자리를 구해준 것도 무학대사이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와 친구관계에 있었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마음을 먹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무학은 조선왕조 최초로 왕사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무학을 제외하고 왕사가 없었다. 그만큼 무학은 이성계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무학은 불교뿐 아니라 풍수지리에도 해박해서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를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성계는 왕자의 난으로 왕에서 물러난 뒤 무학이 있는 절에서 지내기도 했다.
무학대사는 고려시대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하층민이었다. 그래서 일부 역사가들은 무학이 이성계를 통해서 신분상승을 꿈꾸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성계 친구로 역성혁명에 참가했고 조선이 건국된 이후 자신의 능력인 풍수지리를 이용해서 한양 천도와 경복궁 건설에 참여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사찰로 다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