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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금주령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매우 사랑했다. 기록을 보면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술상을 내오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을 정도이고 신라가 멸망한 이유 중 하나가 음주가무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로 음주를 즐긴 민족이다.
신라 수도 경주 안압지를 발굴하다 나온 것 중 하나가 14면으로 된 주사위이다. 주사위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글자에 나오는 행동을 하게 되어있는 일종의 술 게임용 주사위이다.
조선시대 금주령을 최초로 내려진 것은 건국직후인 1392년이다. 조선시대에 금주령이 내려지는 가장 큰 이유는 식량의 부족이다.
흉년이 들면 먹을 쌀이 부족한데 술을 빛어서 먹으면 굶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흉년이 들면 금주령을 내렸다. 가장 많이 금주령을 내린 임금은 태종, 성종, 그리고 영조이다.
태종은 거의 매년 금주령을 내렸고 영조는 10년넘게 금주령을 내렸다. 태종의 경우 보통 먹을 것이 부족한 봄에 금주령을 내리고 추수가 되는 가을에 해제했다.
하지만 영조는 엄격한 금주령을 내렸고 심지어 궁중에서 지내는 제사에도 술을 사용하지 않고 차를 사용하게 했다. 금주령에는 예외조항이 있었다.
- 일반 백성들이 결혼을 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에는 사용이 가능했다.
- 집안에 병든 사람이 있는 경우 약을 대신해서 사용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 술을 빚어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술을 제조하는 것은 묵인해 주었다.
- 외국에서 사신이 올때 접대용으로 사용은 가능했다.
- 국가에서 시행하는 제례에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러한 예외조치 이외에는 엄격하게 통제한 임금이 있었고 느슨하게 관리한 임금도 있었다. 금주령은 대부분 지방에서는 잘 지켜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한양의 사대부나 관리들이 잘 지키지 않았고 단속하는 것도 어려웠다고 한다. 금주령이 내려진 이유 중 하나가 과음으로 인한 사건사고가 많아서 이다.
특히 관료사회에서 과음으로 인해서 사건 사고가 많았다고 한다. 처음 관리가 되면 실시하는 통과 의례인 신참례에서 사고가 끝이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금주령 하면 떠오르는 왕이 영조이다. 영조는 재위 기간 내내 금주령을 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을 엄격하게 금했다.
영조가 오랜 시간에 걸쳐 금주령이 내려지자 부작용도 많았다. 관리들이 금주령을 이용해서 뇌물을 받는 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까지 했다.
금주령을 어기면 해당하는 사람은 물론 지방일 경우 고을을 다스리는 관리까지 처벌을 받아 삭탈관직은 물론 귀향까지 갔다. 그래서 금주령을 단속하는 관리에게 뇌물을 주면서 무마하려고 했던 것이다.
특히 술을 마시는 집이 단속되면 이웃에 있는 3집까지 같이 처벌을 받았다. 이러한 것을 이용해서 단속 관리들이 횡포를 부렸고 이웃끼리도 서로 감시하게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 술에 대해서 가장 관대한 임금이 연산군이다. 본인이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금주령을 실시해야 한다는 신하의 건의는 무시되었다.
그다음으로 술에 대해서 너그러운 임금이 정조이다. 할아버지가 엄격하게 금주령을 내린 것에 대한 반발에서 인지 정조는 술에 대해서 아주 관대했다.
조선시대 금주령은 일반 백성을 위한 것이었지만 결론적으로 일반 백성을 괴롭히는 도구가 되었다. 금주령으로 인한 폐해가 오히려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