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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징비록과 류성룡

디노마드15 2021. 11. 23. 13:37

임진왜란, 징비록과 류성룡

조선시대 최대 비극적인 전쟁 임진왜란과 징비록 그리고 류성룡은 모두 깊은 연관이 있다. 류성룡이 천거한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류성룡은 영의정으로 임진왜란을 진두지휘했다.

징비록은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관심을 가진 책이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원인과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으로 임진왜란에 관한 가장 훌륭한 역사적 사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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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임진년에 일어나 일본과의 전쟁과 정유재란을 합쳐 보통 임진왜란이라고 말한다. 1592년부터 7년간 조선을 전쟁터로 몰아넣은 사건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정벌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조선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은 건국 이후 최고로 평화로운 시기였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준비는 부족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위험을 감지한 조선에서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했지만 당시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된 조정은 통신사의 정보를 분석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으로 동아시아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을 했지만 막대한 전쟁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명나라 내부 혼란으로 국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주변의 민족들이 자주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했고 청나라가 결국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새로운 왕조가 되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시대가 막을 올렸다. 에도막부라고 하는 독특한 정치형태는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다.

 

조선은 주변의 정세 변화에 둔감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 실리외교를 펼쳤지만 결구 인조반정으로 청나라와 적이 되는 상황이 되었고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을 또 겪어야 했다.

 

임진왜란으로 약 100만 명 가까운 백성이 사망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사람들이 일본의 산업과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가 일본을 상대로 크게 이긴 전투가 있었는데 이를 보통 임진왜란 3 대첩이라고 한다. 한산도대첩(이순신 장군), 행주대첩(권율 장군), 진주대첩(김시민 장군).

 

징비록과 류성룡

징비록은 류성룡이 저술한 책으로 "지난 일을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대비한다"라는 시경에 나오는 구절을 책 제목으로 했다. 임진왜란의 원인과 당시 상황, 해결방법과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을 기록한 책으로 류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있을 때 저술한 책이다. 모두 16권 7 책이다.

 

1권과 2권은 총론, 3권에서 5권까지는 근포 집, 6권에서 14권까지는 진사 록, 15권과 16권은 군문 등록으로 되어 있고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진 책이다.

 

류성룡은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 다시는 이러한 일이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원인 파악, 조정의 실책과 앞날의 대비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다.

 

류성룡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호는 서애이고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성리학에 정통하였고 당파는 동인에 속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천거했다.

 

임진왜란 당시 4도제찰사와 영의정을 지내면서 전쟁을 진두지휘했고 북인의 상소로 영의정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한다. 이때 징비록을 저술한다.

 

이순신 장군과는 같은 동내에서 함께 자란 절친이고 후세에 조선의 뛰어난 명재상 5명 중에 한 명으로 평가받는 위대한 인물이 류성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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