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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복위 운동 // 사육신 그리고 생육신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은 자식들 또한 모두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능력을 가진 왕자들이 모두 왕이 될 수 없어서 발생했다.

세종의 아들 문종은 아버지 세종대왕을 도와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병약했다. 세종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 문종이 병약해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 손자인 "단종"의 안위를 신하들에게 부탁했다.

단종, 사육신, 생육신

세종이 걱정한 일은 현실로 다가왔다. 문종은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어린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삼촌인 세조에 의해서 폐위되었다.

 

조선왕조에 단종보다 어린 왕들이 즉위한 적이 많았지만 단종처럼 폐위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할머니나 어머니가 있어 수렴청정을 통해 왕권을 지켜 주었다.

 

가까운 예로 세종대왕 이후 최고의 성군이라고 추앙받는 "성종"도 단종과 비슷한 나이에 즉위했지만 할머니와 어머니 인수대비의 보살핌으로 왕권을 지킬 수 있었다.

 

세조는 왕이 되기 위해서 계유정난을 통해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했고 단종을 복위하려고 시도한 사육신을 포함한 그 일족 수백 명을 사사시켰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피를 많이 본 임금이다. 그래서 아마 평생을 악몽과 피부병으로 고생을 했고 죄책감에 불교에 많은 지원을 했던 것 같다.

 

폐위된 단종은 영월에 유배되어 있었다. 유배된 단종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러한 시도는 실패했다. 실패한 이후 복위 운동의 주모자와 그 가족 600여 명이 모두 참수당했다.

 

복위 운동의 주모자는 모두 7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인 김질이 거사를 사전에 폭로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나머지 6명은 모두 새남터에서 참수당했다. 이들 6명을 사육신이라고 한다.

사육신

  1. 성삼문 :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집현전 학자,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과 6촌
  2. 박팽년 : 집현전 학자, 세조를 왕이 아닌 "나으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3. 이  개  :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 이색의 증손자이다.
  4. 하위지 : 예조판서, 세조가 끝까지 회유했으나 사양함
  5. 유성원 : 집현전 학자
  6. 유응부 : 사육 신중 유일한 무신.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은 연회장에서 세조를 제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같이 거사를 하기로 한 "김질"이 고변을 함으로 실패를 했다.

 

사육신 본인과 아버지를 포함한 직계 가족은 모두 처형당했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처형했고 여자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고 한다.

 

매월당 김시습이 비밀리에 이들을 매장했고 그 자리가 지금의 노량진 사육신 공원이다. 직계 후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박팽년과 하위지 후손이 유일하다고 한다.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 시대에 이들은 복권되어 명예가 회복되었다.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도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세조에 의해서 사사되었다.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면 생육신은 조금 소극적인 방법으로 세조에 대항했다.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 생육신이 알려진 것은 남효온의 문집 "추강집"을 통해서 알려졌다. 생육신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부 다른 의견이 있다.

 

생육신 : 김시습, 성담수, 원호, 이맹전, 조려, 남효온, 유응부이다. 권절을 생육신에 포함하는 사람도 있고 남효온을 생육신에서 빼는 사람도 있다.

 

중종 때 사림파가 조정에 등장하면서 사육신과 더불어 생육신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를 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조가 이들을 공식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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