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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정미환국
조선시대 독특한 정치형 태중 하나가 "환국"이다. 글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국면이 바뀌었다는 뜻인데 요즘의 개념으로 말하면 내각을 총사퇴시키고 새로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환국 정치를 가장 많이 실시한 임금은 "숙종"이다. 모두 3번의 환국을 통해서 왕권을 강화했고 신하들을 숙청했다. 그리고 숙종의 아들 영조도 정미환국을 실시했다.
환국을 하는 이유
환국을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다. 신하들의 권력이 강해지고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실시한다.
숙종은 정치적 위기에 있을 때마다 환국을 실시했다. 현대 정치의 개념을 그대로 도입하자면 집권여당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는 것이 환국이다.
숙종은 조선시대 왕중에서 정통성을 확보한 몇 안 되는 적장자 왕이다. 그래서 왕권이 아주 강했고 당시 조정의 두 세력인 "서인"과 "남인"들이 세력균형을 위해서 환국 정치를 실시했다.
일종의 "탕평책"이라고 할 수 있는 환국정치는 신하들을 숙청하는 잔인한 방법이다. 때로는 왕의 가족도 희생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장희빈이다.
영조가 실시한 정미환국은 아버지 숙종이 실시한 환국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신하들을 숙청하려는 목적보다는 자신이 실시하는 탕평책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경신, 기사, 갑술, 정미환국
조선시대에 환국은 모두 6번이 있었지만 숙종 때 발생한 3번의 환국이 아주 중요한 환국이고 이후 영조 때 발생한 한 번의 환국까지 포함해서 4대 환국이라고 한다.
경신환국 : 숙종 6년인 1680년에 발생한 환국이다. 숙종때 발생한 최초의 환국이고 남인이 대부분 숙청된다. 발생한 이유는 아버지 현종 시대의 예송논쟁이다.
숙종은 신하들이 왕권에 도전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했다. 특히 정권을 잡고 있는 남인에 불만이 있어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 김석주를 기용하면서 남인을 견제했다.
경신환국의 발단은 남의 영수 허적이 왕실이 사용하는 기름칠한 천막(유악)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것이 발단이 되어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조치를 취한다.
허적, 허목, 허견, 윤휴 등이 숙청을 당하고 붕당정치가 붕괴된다. 집권한 서인은 다시 두 개로 나누어지는데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으로 분파된다.
기사환국 : 숙종 15년 1689년에 발생한 환국이다. 배경은 숙종이 장희빈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을 서인이 반대하자 발생했다. 기사환국을 기점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한다.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대부분 숙청되고 사사되었다. 남인과 장희빈이 권력을 잡은 사건이다.
갑술환국 : 숙종 20년 1694년에 발생한 환국으로 숙종시대 마지막 환국이다. 남인이 숙청되고 서인이 재집권을 하고 장희빈은 폐비가 된다.
폐비되었던 인현왕후는 복위가 되고 정권이 교체되었지만 세자(장희빈 아들)은 폐세자 되지 않고 자리를 유지했다. 서인이 집권하고 나서 항상 위협에 시달렸다.
정미환국 : 영조 3년 1727년에 발생한 환국이다. 이후 환국정치는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 숙종이 실시한 환국과 달리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려고 환국을 했다.
역설적으로 정권에서 밀려난 소론과 남인들 중심으로 이인좌의 난을 일으켜 정국이 혼란에 빠지고 영조의 왕권이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 영조는 난을 진압하고 탕평책을 실시했지만 결국은 실패한 정책이 된다.
환국은 아주 독특하고 극단적인 정치형태이지만 숙종은 이를 통해서 왕권을 강화하고 신하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건강한 당파가 만들어지는 데는 실패했다.
누군가는 조선후기 세도정치가 발생한 원인이 환국 정치로 인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념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배척한다면 이 또한 잘못된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