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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그리고 광해군

디노마드15 2021. 9. 26. 10:11

연산군 그리고 광해군

조선시대 왕 중에서 스스로 물러 나지 않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왕위를 내놓은 임금이 몇 명 있다. 고종은 일제에 의해서 단종은 삼촌 수양대군에 의해서 왕위에서 물러났다. 반정에 의해서 강제 폐위된 왕이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연산군,폐위이유, 가족들

조선시대 폭군하면 떠오르는 임금이 연산군이다. 조선 최대의 성군인 성종의 아들로 태어나 성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폭군이 되었다.

연산군,광해군

왕이 죽으면 후손이 왕의 묘에 사용할 묘호를 정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시대 임금의 이름은 묘호이다. 조선시대 왕 중에서 묘호가 "군"으로 끝나는 임금이 두 명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죽어서도 임금의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도 연산군과 광해군은 "일기"로 기록되어 있다. 연산실록이 아닌 연산군일기로 기록된 것이다.

 

연산군이 처음부터 폭군이 된 것은 아니다. 연산군은 적장자로 8살에 세자로 책봉될 만큼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 "윤씨"가 문제였다. 인수대비와 갈등이 있었고 결국은 사약을 받게 된다.

 

성종은 연산군이 어머니가 사사된 것을 알지 못하게 모두들 함구 시키고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자라게 한다.

 

연산군은 18세에 즉위를했고 초기에는 아버지 성종의 뒤를 이은 정책을 실시하지만 포악한 성격이 부각되면서 연산군에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숙청을 했다.

생모에 대한 진실을 알고 나서는 관련된 모든 사람이 화를 입었다. 두번의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를 통해서 거침없이 신하들을 숙청했다.

 

이때부터 연산군의 폭적은 극에 달하는데 사간원을 없애고 성균관을 연회 장소로 사용하고,민가를 헐어 사냥터로 만들고,장녹수라는 궁녀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했다.

 

결국 연산군에게 앙심을 품은 성희안과 박종원이 반정을 일으켜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즉위시킨다. 왕위에서 쫓겨나서 강화도에 유배된 연산군은 폐위되고 두 달 만에 31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연산군의 왕비 신씨도 연산군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았어 죽었다. 세자 황은 강원도 정선으로 유배되어 죽었고 나머지 자식들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일찍 모두 죽은 것 같다.

 

광해군 폐위이유, 가족들

조선 15대왕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이다. 연산군 폐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광해군 폐위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은 명분에만 치중해서 결국 병자호란이 발생한다.

 

광해군 아버지 선조는 조선 최초로 왕비 출생이 아니고 후궁 출생 왕자 중에서 왕이 된 케이스다. 선조는 이러한 자신의 출신성분에 커다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콤플렉스로 인해서 왕비출생 아들이 태어나길 기다렸지만 후궁 출생 아들만 있고 왕비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왕비인 "인목대비"가 왕자를 낳았다. 선조가 그토록 원한 왕자이지만 세자인 광해군이 있는 상태에서 왕자를 세자로 삼기 힘들었다. 이 왕자가 "영창대군"이다.

 

선조가 죽자 광해군은 즉위했다. 하지만 선조가 남긴 갈들의 불씨가 살아 있었다. 광해군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제거해야 했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킨 명분이 "폐모살제"이다.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동생을 죽였다는 이유다. 광해군은 폐위되고 강화도로 유폐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폐되어 18년간 생존한다.

 

연산군과 달리 광해군은 아주 오랫동안 유폐생활을 했다. 왕비와 아들은 모두 죽었다. 특히 세자인 아들은 유배지에서 탈출을 하기도 했다.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곧바로 다시 잡혀서 죽었다.

 

광해군의 딸이 유일하게 살아 남아서 아버지 광해군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광해군의 제사는 딸인 폐서인 옹주와 후손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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