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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장군, 이징옥 장군, 임경업 장군
장수의 길은 험난한 길이다. 무인은 전쟁을 위해서 존재하다 보니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게 멋져 보이지만 남이, 이징옥, 임경업은 뛰어난 무장임에도 불구하고 역모로 몰려 죽었다.
남이장군
남이장군은 우리나라 무속인들이 가장 많이 모시는 인물이다. 귀신도 무서워서 도망을 간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무예가 출중했다. 20살이 되기도 전에 무과에 급제를 했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을 정벌하면서 조선의 영웅이 되었다.
세조가 총애를 하면서 28살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러한 벼락 출세는 훈구대신들이 몹시 불편해했다. 문제는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발생했다.
유자광이 남이장군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발을 하면서 능지처참 형을 당해 죽는다. 본인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죽거나 노비가 되었다. 남이장군은 순조 때에 복권이 된다.
남이장군의 역모에 대한 진실은 유자광과 훈구대신들이 모략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출세를 했고 세조의 총애만 믿고 주변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은 강직한 성격도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영웅 남이장군의 죽음에 대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 남이장군묘가 있는 남이섬은 현재 한류의 중심이 되었다.
이징옥 장군
세조 때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를 칭한 이징옥은 사대주의 사상이 만연한 시대에 대금 황제가 된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역적으로 죽었지만 정조 때 회복되었고 고향에 사적비가 세워졌다.
이징옥은 김종서와 함께 북방 특히 여진족을 토벌하고 4군 6진을 개척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여진족들이 이징옥 장군을 어금니가 있는 돼지라고 부르면서 두려워했다.
청렴하고 무예가 뛰어났지만 단종을 몰아낸 세조의 입장에서는 이징옥 또한 김종서와 같은 일당이라고 생각해서 제거하려고 했다. 이징옥은 자신의 자리를 교체하러 온 박호문과 일행을 죽이고 난을 일으킨다.
여진족을 규합해서 세력을 키우려고 했지만 부하들의 배신으로 피살당한다. 가족은 모두 멸문을 당하지만 막내아들만 유모가 피신시켜 목숨을 구했다.
순조 때까지 숨어 살다가 세상에 나왔는데 인천 이 씨 충강공파가 이징옥 막내아들의 후손들이다. 이징옥의 난으로 세조는 함경도 지역 사람에 대한 차별적인 정책을 실시했고 이러한 것을 영향으로 이시애의 난이 발생하기도 한다.
조선 초기 조사의 난 이후 가장 큰 반란으로 단종을 몰아내 세조를 곤란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징옥 장군의 죽음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이징옥 장군이 죽은 이후 만주 땅과 여진족을 더 이상 관리하지 못했고 이후 병자호란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정조 때 채제공 또한 이징옥을 높이 평가했고 역적이 아니고 충신이라고 생각했다.
임경업 장군
임경업 장군 또한 남이 장군처럼 역모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둘 다 반대세력에 의한 정치적인 희생을 당했는데 차라리 반란이라도 일으킨 이징옥과 다르게 두 사람은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 가족들까지 몰살당했다.
무속인들이 신격화하는 인물 중한 한명이 임경업 장군이다. 조선시대 인물 중 무속인이 신격화하는 인물은 남이장군, 임경업 장군, 곽재우 장군인데 임경업 장군이 그만큼 일반 백성들이 추앙하는 인물이고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발발한 이괄의 난을 집압하는데 커다란 공로가 있는 인조시대 무인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는 임경업 장군이 지키고 있는 백마 산성을 피해서 남한산성으로 바로 쳐들어올 정도로 임경업 장군을 두려워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저항한다. 명나라와 손을 잡고 청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하고 청나라에 체포된다. 인조 때 대표적인 청나라 추종자인 김자점의 무고로 인해서 사형을 당한다.
숙종 때 복권 었다. 임경업 장군이 죽은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시대적인 기류를 읽지 못하고 임진왜란 때 도움을 받은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재조지은 사상에 매몰된 것이다. 어쩌면 무인으로 침략자인 청나라를 토벌하는 것이 당연할지는 몰라도 당시 국제정세를 조선만 거슬리기에는 조선의 힘이 약했고 임경업 장군이 강하지 못했다.